영수증



    영수증(領收證, receipt)이란 돈이나 물품 따위를 받은 사실을 표시하는 증서를 말한다.1) ‘단어 더미 탐미’는 영수증 위에 드로잉을 더했다.

   은영의 영수증 : 기록과 기억


    작년 <영수증>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다. 한 남자 개그맨이 일반인들이 사용한 영수증을 보고 소비 패턴을 파악하여 돈을 어떻게 절약할지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 그 개그맨은 “돈은 안 쓰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영수증을 꼼꼼히 살펴보며 신청자를 분석한 다음 칭찬할 만한 상황에는 “그레이트!(great)”을 외치고, 지적할 만한 상황에는 “스튜피드!(stupid)”을 외친다. 다이어트 한약을 먹으면서 밤마다 야식을 시키면 스튜피드, 1200원 생수를 사지 않고 음식점에서 물을 떠오면 그레이트가 된다.
    절약과 소비 사이에서 평가받는 우리의 영수증들. 하지만 가격만 무심코 흘겨보았던 영수증의 숫자와 글씨들을 다시 천천히 살펴보면 그 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이 작은 종이 안에 적혀 있는 날짜, 시간, 장소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이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기록이다. 누구와 만나 무엇을 먹었는지, 그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은영의 영수증 드로잉.2)

영수증에는 나의 취향이 담겨 있다. 밥보다는 빵, 여름엔 밀크티, 겨울엔 뱅쇼,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 영화, 특별하지 않은 날에 꽃을 사기도 하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쓸모없지만 아름다운 오브제를 사서 모으고, 평소엔 게으르면서도 좋아하는 가수의 내한 공연 티켓팅은 실패하지 않는다.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라는 어떤 책의 문장처럼 이 영수증들의 글씨와 숫자들은 모두 ‘나’라는 사람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나는 이 작은 영수증 위에 그날의 기억을 겹쳐 그림으로 남기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수증 위의 잉크는 서서히 지워져 텍스트는 사라지고 그림만 남게 된다. 선명했던 기억이 점차 흐릿해지고 어떤 깊은 인상만 남듯이, 이 영수증 드로잉 과정은 머릿속에 기억이 새겨지는 과정과 닮아 있다. 나의 영수증들은 내 일상의 작은 기록이자 기억이다.

“작은 영수증 위에 그날의 기억을 겹쳐 그림으로 남기고 있다.”

   샛별의 영수증 : 서울, 푸른색


샛별의 영수증 드로잉
[매장명] 서울특별시
상품명 단가 금액
아메리카노 피로회복제 4,500
도시락 저녁없는삶 4,000
캔맥주 간편한 위로 3,000
닭발&소주 친구의 안부 20,000
종합비타민 생존 25,000
립스틱 홧김 비용 35,000
    나의 영수증은 서울이다. 몇 달간 나의 영수증 내역은 이렇다. 요리할 시간이 없어서 배달의 민족이 되고, 사람 대신 맥주와 슬픔을 나누기도 한다. 마감이 쫓아오고, 무너지는 눈꺼풀을 위해 커피를 마신다. 가끔 내 시계는 고장 났다. 몰린 일들이 몇 개월 치의 나를 삭제한다. 또는 늘어진 고무줄 바지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무한대로 늘어나는 시간들 속에서 다음 작업을 기다린다. 내게 서울은 푸른색이다. 푸른색은 각자 떠 있는 빙하 조각이지만, 푸른 새벽에 반짝이는 건물들은 사랑스럽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각자의 행성에서 보내는 모스부호 같다.

   휘리의 영수증 : 행동의 관성


    언젠가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행동에도 관성이 있죠. 매일 듣는 라디오 채널을 잘 바꾸지 않는다든가……”
    좀처럼 바꾸기 힘든 라디오 채널. 먹어본 메뉴만 선택하기.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니는 습관. 한 번 고정된 일상적 규칙과 패턴을 잘 바꾸지 않는 사람. ‘행동의 관성’.

휘리의 영수증 드로잉. 얼마 전 독립 출판한 서적을 입고시키기 위해 우체국에 몇 번이나 방문했다. 우체국에 방문할 때마다 받아놓은 영수증에는 모두 같은 지점명이 찍혀 있다. 우리집은 두 개의 우체국 사이 꼭 가운데 위치해 있는데, 가는 거리와 수고가 똑같지만 언제나 가던 우체국에 가 소포를 부쳤다.

카페 영수증. 항상 가는 카페, 언제나 같은 메뉴, 늘 앉던 그 자리. 집 주변에 수 곳의 카페가 새로 생겼지만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다.
    ‘행동의 관성’이라는 말을 솔직하게 풀어 설명하자면, 실은 실패가 두려운 마음이다. 그 실패라는 것이 겨우 한 번 맛없는 커피를 먹게 되는 일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특별한 영수증’.
    시시한 영수증 더미에서 ‘특별한 영수증’을 몇 개 발견했다. ‘특별한 영수증’이란, 관성을 깨고 새로운 곳에서 소비한 영수증을 말한다. 처음 가본 장소, 평소 먹지 않던 메뉴를 선택한 날. 그저 관성에 따른 선택을 한 날 영수증에는 어떤 기억도 새겨져 있지 않았지만, 이 ‘특별한 영수증’을 살펴보자 그 날의 모든 기억이 불러져 온다.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날씨가 어땠는지까지도……

휘리의 ‘특별한 영수증’.
    나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망설이지 않고 관성을 깼다. 선택의 결과에 상관없이 즐거울 수 있는 사람과 있을 때 말이다. 그때만큼은 이 강력한 관성에서 벗어나 작은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마주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고른 음식이 맛있어서 웃고, 맛이 없어서 웃는다. 단풍이 보고 싶다는 친구의 말 한마디로 떠난 여행지 영수증은 그날의 기온과 옷차림까지 기억해내게 한다. 기억이 있는 날은 언제나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시시한 영수증 더미 사이에서 찾아낸 이 ‘특별한 영수증’은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함께여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휘리의 영수증 드로잉 전체. 강력한 행동의 관성 속에서 반짝이는 ‘특별한 영수증’.



1) 표준국어대사전
2) 백은영의 영수증 드로잉을 감상할 수 있는 사이트 주소. http://beyillust.com/index.php/receipt/
단어 더미 탐미
은영. 일러스트레이터. 마음에 깊이 남아 잊혀지지 않는 것을 담아 기록하고 그립니다.
샛별. 그림책 작가. 건강히 오랜 호흡으로 그림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휘리. 일러스트레이터. 살아 있는 것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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